본문 바로가기

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
✅ 레거시 콘텐츠 3건 복구 완료
전투복, 십자가 현행범, 다시 마가자 행로 - PHP 레거시 사이트에서 복구되었습니다. (2026-03-30)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다시 마가자 행로
차쿠지기 2026-01-23 23:41 조회 109

다시 마가자 행로

 

“저는 여기(태국 샴)에 영원히 살 것처럼 머무르고, 내일 곧(조선으로) 떠날 것처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제1대 교구장 발트르메오 브뤼기애르 소蘇주교는 자신의 편지글을 실제의 행동에 옮겼다.

22년 전, 그래서 이 한마디에 매료되어버렸다. 그가 나선 ‘그 길’ 위에서나 불 것 같은 바람 한 줄기에 이끌리고 말았다. 그렇게 2003년,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양업교회사 연구소장 차기진 박사와 마가자馬架子행을 했다. 한국인 사제로서가 아니라 아예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밟은 초대 주교의 묘역이다. 너무 하느님께만 의탁한 나머지 인간적으로는 무대뽀처럼 보이는 그의 행로가 멈춰 선 곳, 그 멈춰진 자리에 다시 묘비로 솟아 지금까지도 번뜩이는 이 ‘선교사 정신’이란 것이 그로부터 2년 후에 중국으로 나올 결정적 ‘용기’가 되어 주었다면, 또 더 몇 년 뒤 재차 자원하여 20년 째 나와서 살고 있는 내 중국 생활의 ‘첫 마음’이 되었다면, 그때 그 바람은 살랑살랑, 실로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d90de18f9440d2ea5382794fa77699e7_1769181221_6097.png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비단 선교사 정신만은 아닌 것 같다. “영원히 살 것처럼 머무르고”,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나 ‘지금, 여기 hit et nunc ’에 충실하겠으나 - “내일 곧 떠날 것처럼”, 그러니까 현실에 집착하지는 않겠다는, 왠지 우리네 인생 자체가 끊임없는 순례길이 아니겠냐는, 보다 광범위한 뜻은 아닐까? 진정 영원한 곳으로 손짓하는 바람결은 아니었을까?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대저 만인 모두를 부르는 바람결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토록 솔깃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지난 수년간 코로나19에 막혀 엄두도 못 내던 마가자 행이었다.

2025년 초에 광주교구 희망의 순례팀이 꾸려졌고 서만자와 마가자, 차쿠까지 동행하자는 연락이 왔을 때, 6년 전 서만자 주임 유신부에게 소주교님과 김대건 신부님 대형 액자를 선물하며 “만약 이분들 옆에 최양업 신부님 액자를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 고 엄포를 놓았기에, 진짜 최양업 액자를 걸어놓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증 먼저 폭발했다.

 

순례 1일 차, 중국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온 지도 신부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순례단이 상봉한 곳은 북경의 북당이었다. 1784년 그라몽 신부가 이승훈에게 베드로라는 첫 세례명을 주었을 당시, 혹여 동행했을지도 모르는 그 어느 조선인처럼 이리저리 관람객의 눈으로만 훑고 있을 때, 우리를 따뜻이 맞아주신 분은 다름 아닌 ‘중화 성모’이시다. 그 유명세만큼 원상元象이 주는 이미지는 국경을 초월하는 강한 모성애를 보이고 계셨다.

남당으로 이동하여 장엄한 제대에서 미사를 시작할 시각은 오후 4시가 넘어있었다. 1831년 9월 9일, 조선 교회를 낳은 모교회 북경의 주교좌 제대에서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은 것은 주례 사제만의 체험이었을까? 그 소리는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했던 브뤼기애르 주교의 응답 위에 잉태된, 신생 조선 교회의 태동 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d90de18f9440d2ea5382794fa77699e7_1769181238_2636.png 

2일 차 서만자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른 장가구張家口 성당부터 어쩐지 슬슬 지하 교회 같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방문한, 낡았지만 거짓말처럼 깨끗한 성당 마당에서 90살이 넘었다는 노사제를 만났을 때 나는 팀원들의 눈치부터 살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물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순례자들 역시 옆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한평생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교회의 사제로서 겪어야 했던 그 무엇인가가 노사제의 얼굴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인사만 나눴는데도 나 역시 백발이 된 작은 아이처럼 그의 품안에 안기고 싶었던 것을 어찌하랴!

 

손을 흔드는 노사제를 뒤로 하고 서만자로 가는 30여킬로의 구간은 191년 전, 말이 좋아 ‘선교 보호권’이지 포르투갈의 독점권에 내몰려, 눈치껏 북경을 떠나 살아야 했던 프랑스인 소주교의 막막함이 전해오는 길이었다. ‘조선 교구장’이라는 임명장 하나 달랑 들고 몸을 의탁해야 했던 서만자, 소주교는 정확히 1년이 되자 병든 몸을 끌고 서만자를 떠나는데, 단 하루만이라도 지체한다면 ‘조선으로 향한 마음’이 약해질까 스스로 경계한 까닭이다.

 

예상했던 대로 서만자 대성당은 거대했다. 농촌 도시에 명동성당 두 배나 되는 성전이 거의 완공 직전에 있음이 놀랍기만 하다. 가령 내가 사는 동북 지방 대련시大連市 같으면 인구 720만명에 교세 3,000명의 본당이 딱 하나 있을 뿐인데, 인구 20분의 1도 안 되는 서만자에 교세 10,000명이 넘는 성당이 두세 개라니 실로 놀랍다.

 

3일 차야말로 순례의 목적지로 접근하는 여정이다.

사실 이번에 브뤼기애르 주교 말씀 중 새롭게 발견한 구절이 있다. “실패할 줄 미리 알았다. 그래도 나는 조선으로의 길을 계속 가려 한다.” 도대체, 실패할 줄 알면서도 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인가? 동료들은 물론 조선 교회 지도자들 역시 환대하지 않는 길, 그러나 성사에 굶주려 있는 민초 신자들을 생각하며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온 몸을 던져” 걷고 또 걸었다. 도대체 이와 같은 길이란 분명 ‘신앙의 길’ 아니면 ‘사랑의 길’뿐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바보스러운 길을 계속 가는가? 목숨을 걸고 걸었던 길, 그의 길이 멈춰진 마가자! 우리는 소주교님의 이름이 적혀 있는 묘비에 머리를 대고 한참을 멍하게 있어야 했다. “당신이 다 걷지 못한 길을 이제야 후손들이 거꾸로 와서 잇습니다. 한가지 약속드리는 바는 앞으로 어떠한 길 앞에서든 결코 마음 산란해지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길 위일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웅변하는 ’길 위의 비석‘을 뵙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내일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해야 하는 유한 시간의 여행자이기 때문입니다.”

 d90de18f9440d2ea5382794fa77699e7_1769181259_1962.png 

마가자를 떠나 심양으로 향하는 여정은 브뤼기애르 주교님만큼 “길 위의 사도”이셨던 최양업 신부님을 쫓는 길이다.

7일 동안 모두 일곱 번의 미사를 드렸다. 첫날은 북경 남당의 장엄한 제대에서, 둘째 날은 서만자 대성전의 지하 성당에서, 셋째 날은 적봉赤峯이 보이는 버스 안에서, 넷째 날은 마가자의 독실한 신자 집무실에서, 다섯째 날은 여행 가방을 쌓아 만든 제대에서 북한 땅을 보며 ’압록강변 버스 안 남북한 민족 화해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다섯째 날은 나의 집이라 할 수 있는 차쿠岔溝 성당에서, 마지막 일곱째 날은 호텔의 침실에 몰래 모였으니, 각기 다른 미사의 추억이 일곱 색깔 무지개로 여태 우리들 기억 속에 가교처럼 떠 있다.